[강석기의 과학카페] 나이가 들면 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
‘잠들면 업어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비유적 표현이었지만 요즘은 그랬던 시절이 그립다. 서너 시간 자고 나면 거의 예외 없이 잠이 깨고 바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기 마련이라지만 벌써 이러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그런데 왜 나이를 먹을수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걸까.
수면 과학자들은 생체시계의 영향력이 떨어진 결과라고 설명한다. 나이가 들수록 하루 24시간 주기인 각성과 이완 그래프(사인 곡선 같은)의 진폭이 작아진 결과라는 것이다. 밤이 되면 각성도가 급격히 떨어져 잠이 들고 잠든 상태가 아침까지 죽 이어져야 하는데 낙폭이 작아지다 보니 잠들기도 어렵고 쉽게 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성도 그래프를 그리는 함수는 f(x)=a·sin(2πx/24)로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x는 시간(시)). 나이가 들수록 a가 작아져 그래프 진폭이 작아지고 그 결과 낮에 머리가 맑지 않고 밤에는 잠들기 어렵고 중간중간 깬다는 말이다.
실제 각성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오렉신(히포크레틴이라고도 부른다)의 수치는 하루 24시간 리듬을 보인다. 오렉신은 뇌의 시상하부에 존재하는 오렉신뉴런(Hcrt뉴런이라고도 부른다)에서 만들고 분비한다. Hcrt뉴런은 불과 수천 개밖에 안 되지만 뇌 곳곳의 각성과 관련된 부위로 가지(축삭돌기)를 뻗고 있다. Hcrt뉴런이 활성화되면 축삭돌기 말단의 시냅스에서 오렉신이 분비돼 각성 신호를 전달한다.
흥미롭게도 나이가 듦에 따라 Hcrt뉴런의 수가 줄어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결과 각성 신호 세기가 약해져 낮에 두뇌 회전이 예전만 못하게 된다. 그런데 오렉신만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밤에 잠들기 어렵고 자다가 수시로 깨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각성을 담당하는 Hcrt뉴런의 수가 줄면 잠들고 수면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동적으로 이완을 일으키는 물질이 따로 있고 오렉신처럼 나이가 들수록 수치가 낮아져 수면 질 저하가 나타나는 걸까.
학술지 ‘사이언스’ 2월 25일자에는 오렉신으로 나이가 들수록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이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Hcrt뉴런이 점점 더 민감해져 약간의 자극으로도 활성화돼 오렉신을 분비하고 그 결과 각성 네트워크가 수시로 작동해 잠드는 걸 방해하고 자다가 자주 깬다는 것이다.
Hcrt뉴런이 민감해지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뉴런 세포막에 있는 KCNQ 포타슘(칼륨) 통로 단백질이 줄어들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세포막에 이 통로 단백질이 충분히 있어야 정상적인 문턱, 역치(threshold) 이상의 자극에만 반응해 Hcrt뉴런이 활성화돼 각성 신호를 보낸다. 나이가 듦에 따라 KCNQ 단백질 밀도가 낮아지고 그 결과 역치가 낮아져 Hcrt뉴런이 과민해진다는 말이다. 결국 Hcrt뉴런 수가 줄어 어느 순간 분비되는 오렉신의 양은 적어지지만 대신 활성화 빈도는 잦아진다.
‘수면 장애가 있더라도 눈 감고 누워있으면 어느 정도 잠자는 효과가 있는 거 아닌가?’ 수면 장애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깬 상태로 누워 쉬는 것은 결코 수면을 대신할 수 없다.
잠을 왜 자야 하나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대사량을 줄여 환경에 적응하는 행동이라는 생태적 관점과 깨어있는 동안 겪은 일들을 편집해 기억으로 저장하는 과정이라는 인지적 설명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뇌가 활동하면서 쌓인 노폐물(주로 변형된 단백질)을 청소하는 시간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다.
지난 2013년 뇌의 활동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처리하는 청소 체계인 ‘글림프 시스템’이 발견됐다.
'글림프(glymph)'는 '교세포(glia)와 '림프(lymph)'의 합성어다. 동맥과 이를 둘러싼 교세포 사이의 공간을 흐르는 뇌척수액이 뇌세포 사이의 공간으로 침투해 여기에 쌓여있는 노폐물을 쓸고 정맥과 이를 둘러싼 교세포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간 뒤 정맥 뇌 밖으로 빠져나가 목에서 림프계와 합류한다. 노폐물을 함유한 림프액은 정맥으로 들어가 혈액과 합쳐지고 간에서 노폐물이 분해되고 재활용된다.
뇌의 글림프 시스템은 잠을 잘 때 작동하고 깨어있으면 억제된다. 수면 가운데서도 비렘(NREM)수면이 바로 청소 시간이다. 잠이 들면 먼저 비렘수면이 꽤 오래 지속된 뒤 흔히 꿈을 꾸는 시간이라는 렘(REM)수면이 나타난다. 일단 청소부터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낮에 버티다 밤에 잠이 들면 비렘수면 기간이 늘어나는 것도 청소할 게 많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어 Hcrt뉴런 개수가 줄어들고 민감해지면 비램수면의 지속시간이 짧아지고 깊이도 얕아진다. 비렘수면은 1단계에서 3단계까지 있고 깊은 잠인 3단계에서 청소 효율이 높은데 나이가 들면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다. 그 결과 청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뇌에 노폐물이 쌓이고 결국 치매나 파킨슨병 같은 신경퇴행성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커진다. 실제 이들 환자 대다수가 발병하기 수년 전부터 수면 장애로 고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화에 따른 수면 장애는 신경퇴행성질환의 주요 위험 요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Hcrt뉴런은 각성에 관련된 부위로 축삭돌기를 뻗어 그 부위의 뉴런과 만난 시냅스에서 오렉신을 분비한다. 해당 부위의 뉴런에는 오렉신 수용체가 분포한다. 노화로 Hcrt뉴런이 민감해져 밤에도 오렉신을 분비해 수면 장애를 일으키므로 오렉신 수용체를 차단하는 약물을 만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오렉신 수용체가 제 기능을 못하면 각성 신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스위스 제약사 아이도시아가 개발한 불면증 치료제 큐비빅(Quviviq. 성분명 다리도렉산트(daridorexant))을 승인했다. 큐비빅은 오렉신 수용체 길항제라는 새 작용기전의 불면증 치료제다. 오렉신 수용체에 먼저 달라붙어 Hcrt 뉴런에서 분비된 오렉신이 결합하지 못하게 방해해 작용하는 약물이다. 큐비빅은 5월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기존 불면증 치료제는 억제성 뉴런을 활성화하거나 뇌 활동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리는 작용을 통해 약효를 낸다.
뜻밖에도 큐비빅은 최초의 오렉신 수용체 길항제가 아니다. 지난 2014년 미국 머크의 벨솜라(Belsomra·성분명 수보렉산트(suvorexant))가 처음 승인됐고 2019년 일본 에자이의 데이비고(Dayvigo·성분명 렘보렉산트(lemborexant))가 두 번째로 승인을 받았다.
이들은 기존 불면증 치료제에 비해 효과가 뛰어나고 부작용은 적다고 한다. 단순히 잠이 들게 하는 게 아니라 잠의 구조를 정상화하는 효과가 있어 글림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불면증 치료와 함께 인지력 저하나 신경퇴행성질환의 위험성도 낮출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약이 그렇듯이 오렉신 수용체 길항제도 이런저런 부작용이 있고 모든 유형의 수면 장애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렉신 수용체 길항제는 고가라서 그런지 몰라도 2014년 출시된 벨솜라도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문헌을 보면 2020년 출시된 데이비고가 약효와 부작용 측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인구 고령화로 수면 질 저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신약이 하루빨리 도입돼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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