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출처: 동아사이언스, 강석기.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48752
호주가 원산인 담배속 식물(학명 Nicotiana benthamiana)은 식물유래 백신을 만드는 미니공장으로 적합하다. 아그로박테리움에 쉽게 감염되고 성장이 빨라 단기간에 잎에서 단백질을 많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지난해 연말 글로 다룬 메신저리보핵산(mRNA) 코로나19 백신을 드디어 맞았다. 부작용이 약간 걱정되기도 하지만 50대에서는 위험보다 혜택이 훨씬 크다는 역학(통계) 연구를 믿고 몸을 맡겼다. 인류에게 코로나19 팬데믹은 대재앙이지만 이를 계기로 mRNA 의약품이 무대에 등장할 기회를 얻었고 앞으로 나올 이 계열의 의약품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걸 생각하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최근 또 다른 계열의 코로나19 백신이 임상3상에 들어갔고 잘하면 올해 안에 출시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식물이 백신 성분을 만드는 '식물유래 백신이다.
식물을 재배해 코로나19 백신 같은 의약품을 수확하는 일을 ‘분자농업’이라고 부른다. 아직 분자농업으로 생산된 약물이 나온 게 없으므로 코로나19 백신이 상용화된다면 식물유래 백신뿐 아니라 분자농업 의약품으로도 최초가 되는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덕을 보는 두 번째 행운아가 될 수도 있는 식물유래 백신에 대해 알아보자.
토양세균인 아그로박테리움 투메파시엔스(Agrobacterium tumefaciens)는 식물에 감염해 종양(뿌리혹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지닌 DNA 조각(T-DNA)을 식물 세포에 주입하는 병원체다. 이 메커니즘을 이용해 종양 유발 유전자를 없애고 대신 원하는 유전자를 넣은 DNA 조각을 식물 세포(plant cell)에 주입해 전사 및 번역 과정을 통해 단백질(protein)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돼 널리 쓰이고 있다. 식물유래 백신도 이렇게 얻는다.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McDonald/Nandi Lab 제공
○ 식물 감염하는 세균 이용
그런데 생각해보면 분자농업이 새로운 분야는 아닌 것 같다. 먹을거리가 아니라 약물(분자)을 얻으려고 식물을 키우는 게 분자농업이라면 진통제 모르핀을 얻기 위해 양귀비를 키우는 것도 분자농업 아닐까.
최종 수확물이 특정 분자일지라도 원래 작물이 만드는 생체물질이라면 분자농업에 포함하지 않는다. 분자농업은 원하는 단백질 약물의 유전자를 집어넣은 식물을 재배하는 과정이다. 개별 식물체가 외부 단백질을 만드는 일회용 배양기 역할을 하는 셈이다. 분자농업이라는 용어는 한 세대 전인 1986년 만들어졌고 그 뒤 백신이나 단일클론항체 등 여러 단백질 의약품을 분자농업으로 만드는 연구가 진행됐지만 아직까지 상용화된 건 없다. 이미 다양한 의약품 생산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대량 생산 설비 구축에 들어가는 투자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막강한 상대가 등장하면서 의약계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현장에 적용한다는 ‘열린 마음’을 갖게 됐다. 덕분에 수십 년째 지지부진하던 mRNA 백신도 빛을 보게 됐고 분자농업으로 만드는 식물유래 백신 역시 전망이 밝다.
분자농업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시간 내에 의약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단백질 약물 유전자를 담은 DNA 조각을 만들어 아그로박테리움이라는 세균에 넣는다. 배양한 세균이 희석된 물에 식물체를 담그면 세균이 잎에 감염하면서 식물 세포 안으로 DNA 조각을 주입한다. DNA 조각은 식물의 핵으로 이동해 유전자를 발현시키고 식물의 리보솜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단백질을 만든다.
미생물이나 동물세포를 대상으로도 비슷한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더 걸리고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배양기에서 세포를 키워야 한다. 반면 분자농업에서는 아그로박테리움과 접촉해 외부 DNA를 받은 식물체를 온실에서 며칠 키운 뒤 수확해 단백질을 추출하면 되니 훨씬 간단하다.
분자농업에는 여러 식물을 쓸 수 있지만 백신의 경우 호주가 원산인 담배속 식물(학명 Nicotiana benthamiana)을 선호한다. 잎으로 담배를 만드는 작물인 담배와 가까운 친척으로 성장이 빠르고 아그로박테리움에 쉽게 감염돼 넓적한 잎에서 외부 단백질이 많이 만들어진다.
○ 바이러스유사입자로 항체 형성 유도
식물유래 백신인 바이러스유사입자(VLP)는 온전한 형태(녹색)로 림프조직까지 이동해 면역계가 진짜 바이러스로 인식해 강한 면역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메디카고 제공
현재 식물유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해 임상3상을 진행하고 있는 곳은 1999년 설립한 캐나다의 바이오테크회사 메디카고로 거대 제약사 GSK가 파트너다. 참고로 메디카고(medicago)는 콩과 식물인 개자리의 속명으로, 질소고정을 연구하는 모델식물이다. 식물로 승부를 거는 회사라는 말이다.
이 회사가 백신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는 지난 2003년 발생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고병원성 조류독감바이러스(H5N1)의 등장이다. 이처럼 변형 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면 백신 개발에 5~6개월이 걸리는 기존 방법으로는 재빨리 대응할 수 없다. 개발 기간을 5~6주로 크게 줄일 수 있는 식물유래 백신 개발이 시급한 이유다.
독감 백신에서 항원이 되는 건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인 헤마글루티닌(HA)이다. 그러나 HA만 달랑 만들어 추출해 백신으로 쓰면 항체 형성이 잘 안 된다. 바이러스 입자 표면에 박혀있는 상태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기술이 바이러스유사입자(VLP)다.
바이러스는 캡시드 단백질 수십~수백 개가 모여 만든 껍질 안에 DNA 또는 RNA로 이뤄진 게놈이 들어있는 나노입자다. 독감바이러스나 코로나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바깥쪽을 '외투'라고 부르는 지질막이 싸고 있는 구조로 지질막 성분은 숙주 세포막에서 가져온다. 따라서 VLP 유형의 백신을 만들려면 항원이 되는 유전자와 함께 캡시드 단백질 유전자도 집어넣어야 한다. 그러면 속이 빈 껍질 표면에 항원 단백질이 박혀있는 VLP가 만들어진다. 물론 속에는 바이러스 게놈이 들어있지 않다. 바이러스 ‘유사’ 입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바이러스유사입자(VLP) 형태의 백신은 면역계가 진짜 바이러스로 인식해 강한 면역반응을 일으켜 중화항체가 잘 만들어진다. 왼쪽은 독감바이러스 입자이고 오른쪽은 독감백신 VLP다. 겉모습을 보면(도식적 표현(a)과 전자현미경 이미지(c)) 지질막 외투(붉은색)에 HA(녹색)이 박혀있는 모습이 서로 꽤 비슷하지만 단면을 묘사한 그림(b)을 보면 VLP는 게놈(엉킨 실)은 물론 단백질 껍질(연두색)도 없어 안이 비어있다. ‘식물 생명공학 저널’ 제공
VLP 백신은 이미 상용화됐다. 독자들도 익숙한 자궁경부암백신 가다실이 VLP로 인간유두종바이러스(HPV)의 L1 캡시드 단백질 유전자를 효모에 넣어 배양하면 L1 단백질이 만들어지면서 알아서 캡시드 입자로 조립된다. 인체 면역계는 L1 캡시드 단백질을 항원으로 인식해 항체를 만든다. B형간염 백신도 VLP다.
독감백신의 경우 항원인 HA의 유전자와 껍질의 구성 성분인 M1 단백질의 유전자를 같이 넣어야 VLP가 만들어질 것이다. M1 단백질로 이뤄진 껍질 바깥에 지질막이 덮이고 지질막 여기저기에 HA 단백질이 박혀있는 구조다. 그런데 막상 실험을 해보니 M1 없이 HA만 있어도 VLP가 만들어졌다. 이는 HA 단백질에서 지질막에 박혀있는 부분의 기하학적 구조가 지질막이 입자 형태를 이루게 유도한다는 뜻이다.
VLP를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독감바이러스 입자와 꽤 비슷하다. 실제 인체에 들어온 VLP는 구조가 유지된 채 림프조직으로 이동하고 그곳에 있는 면역세포는 진짜 바이러스로 착각해 일련의 면역반응을 개시하고 그 결과 중화항체가 만들어진다. 임상시험 결과를 보면 기존 백신보다 우수한 항체 형성 효과가 나타났다. 현재 임상3상까지 마쳤지만 상용화에는 설비투자가 필요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고 메디카고도 부랴부랴 코로나 백신 개발에 뛰어들었다.
○ S와 HA 키메라 단백질
식물 세포질에서 만들어진 항원 단백질은 세포막의 성분인 지질을 끌어들여 바이러스유사입자(VLP)를 만든다. VLP는 세포막(pm)과 세포벽(cw) 사이 공간에 축적된다. ‘식물 생명공학 저널’제공
코로나19바이러스에서는 표면의 스파이크(S) 단백질이 항원이 된다. 그런데 VLP를 만들려면 S단백질과 함께 M단백질과 E단백질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유전자 세 개를 넣어야 하는데 연구자들이 여기서 약간의 트릭을 썼다. 독감백신 VLP는 HA 유전자만 넣어도 VLP를 만들 수 있으므로 S단백질 유전자에서 지질막에 박히는 부분의 염기서열을 HA의 해당 부분으로 바꿨다(S/HA). 그 결과 바람대로 S/HA단백질 유전자만 넣어도 VIP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든 식물유래 코로나백신으로 지난해 7월 임상1상에 들어갔다. 성인 180명을 대상으로 안전성과 함께 적정 투여량을 알아보는 임상이다. 3주 간격으로 두 차례 접종한 결과 코로나19에 걸려 완치한 사람들에 비해 중화항체의 양이 10배가 넘었고 부작용은 미미했다. 임상1상 결과를 정리한 논문은 학술지 ‘네이처 의학’ 6월호에 실렸다.
지난해 11월 시작된 임상2상은 성인 588명을 대상으로 진행됐고 역시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 내용을 담은 논문은 현재 투고된 상태다. 그리고 올해 3월 3만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3상이 시작됐으므로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미 나온 다른 백신들과 효과를 비교해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된다면 제품화 단계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메디카고는 캐나다 퀘벡시에 생산량 5000만 도스(1회 접종분) 규모의 설비를 지을 계획이다. 세균 접종과 담배 재배와 수확 과정이 자동화된 초대형 온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식물유래 백신의 가장 큰 장점은 신속성이다.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했을 때 게놈을 해독해 항원이 되는 단백질(독감바이러스는 HA, 코로나19바이러스는 S단백질)의 유전자 정보를 알면 바로 DNA 조각을 만들어 아그로박테리움에 넣고 이를 식물(담배)에 감염시켜 4~6일 키워 수확해 바이러스유사입자를 정제하면 되기 때문이다.
백신 개발에 성공해 코로나 팬데믹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는 연초의 희망은 델타 변이의 등장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심지어 병원성이 더 크고 기존 백신이 잘 안 듣는다는 람다 변이도 이미 30여 개 나라에 퍼졌다. 이런 상황에서 식물유래 백신 생산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내년에 또 접종해야 한다면 식물유래 백신을 한번 맞아보고 싶다.
이제 분자농업은 상용화만 남겨놓은 상태다. 이를 위해서는 세균 접종과 담배 재배 및 수확 과정이 자동화된 대규모 생산 시설(온실)이 필요하다. 메디카고 제공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2012년 9월부터는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9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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